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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세한 감독의 나의 인생 영화인생 5
양지혜  |  ych20021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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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4.25  14:3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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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쯤 고모님은 안암동 5가 로타리에 가게를 확장해서 옮기고
그 뒤에 있는 주택에 방을 얻었다.
안암동 5가는 고려대학교 이공대학이 있었고 시인 이은상씨가 근처에 살고 있었다.
고대 이공대에는 금속 공학 박사인 이종남 교수가 있었는데 그는 바로 나의 매형이셨다.
나의 초등학교 4학년 담임을 했던 사촌 누나 노정호 (蘆貞鎬) 선생의 남편이셨다.
그래서 고모님도 그 곳에 자리를 잡으신 것이었다.
그 집은 한옥으로 집주인은 고모님과 비슷한 나이에 주명월(朱明月)이란 아주머니인데
고향이 이북이고 이름과는 달리 좀 거세 보이는 또순이아줌마였다. 남편도 없이
나와 동갑인 아들과 두 딸을 데리고 살았다. 우리 방 옆엔 고병국이라는 분이 사셨는데
키가 후리후리하고 역시 이북 분인데 평양 사투리여서 주인 주명월씨의 함경도 말투와
어우러져 분위기가 재미있었다. 고병국씨가 월남한 후 재혼한 부인은 고모님과 잘 지내고 동생처럼 다정한 사이여서
나는 누님이라 부르며 따르고 가깝게 지냈다.
문간채에는 포천이 고향인 7남매를 거느린 서씨 내외분이 세들어 살았다. 큰애가 한성여고 2학년이고 밑으로 성신여중생 등 이하 줄줄이 동생들이 있어서 친형제가 없는 내겐
다복해 보였다. 아침이면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이 대문 밖에 재래 푸새식으로
되어있어 긴 줄을 서야 하는 곤혹스러운 골목 안 풍경이 펼쳐졌다.
그러나 그 어려운 중에도 이 집 저 집에서 특별한 음식을 하면 서로 돌려서
나눠 먹는 정겨움과 이웃 간의 풍성한 정감이 있었다.
정복자 한 작품을 완성도 있게 만드는 일에 동참한 내 자신이 대견하고 자랑스럽고
자신감도 생겼다. 더욱 매진하여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궁리 끝에
멋진 화면을 만들어내려면 사진을 많이 찍어 봐야하고 구도를 잘 잡으려면 그림을
계속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국문과 1년을 수료한 것으로 하고 미대를 가기로 했다.
2년제 서라벌 예술대 서양화과에 들어갔다. 또 카메라 하나를 사서 이 것 저 것 마구
찍어보기 시작했다. 한성 여고생을 마을 뒷동산(고대 이공대 야산) 배경으로 이리저리
찍어주며 여러 가지 나름의 공부를 하느라고 했다.
 
다음 작품이 결정 났다. 가야금의 창시자 우륵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사극이었다.
준비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퇴계로(명동 건너편) 남산초등학교 옆 조연순 산부인과
건물이 있었는데 건물주이며 여의사인 조연순 원장이 ‘가야금’ 영화의 제작자였다.
내 기억에 남편이고 자식이고 보이지 않았고 남동생 하나가 시중드는 걸 보았다.
자그마한 키에 강원도 사투리를 쓰는데 결단력이 있어 보였고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문이 난 산부인과 의사였다. 그 당시 산아제한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때여서
아마 그 영향도 있었으리라 여겨졌다. 1963년, 라면이 한국시장에 상륙하여 인기가
상승했다. 닭고기 맛의 삼양라면! 그것이 내게 주식이 되어버렸다.
조원장의 산부인과 병원은 온돌방 입원실이 많이 갖추어진 건물이었다.
제작 사무실이 건물 안에 있어 난 열심히 들락거리며 일을 했고 그런 나를 배려해서
조원장이 내가 쓸 방을 하나 내주어서 원장네 식구처럼 기거하며 일을 하게 되었었다.
‘가야금’도 정복자 못지않은 대작이었다. 시나리오 탈고에 시간이 걸렸고 본격적인 준비
전의 대기상태였다. 그런 막간에 영화 본지도 오래고 해서 영화를 보러 다녔다.
가까운 거리인 대한극장 건너 골목 안에 ‘아테네’ 극장이라는 학생 전용극장이 있었는데
청주의 공보관 영화관 같은 느낌이어서 단골이 되었다.
한 집 울안의 한성여고생과 함께 약속을 잡아 보기 시작한 것이 연인처럼 데이트가
이루어진 장소가 되었다.
 
오드리 헵번의 ‘전쟁과 평화’ 율 브리너의 ‘대장 부리바’
‘우리 생애 최고의 해’ ‘십계’ 그리고 뒤늦게 수입된 ‘벤허’를 보았다.
한국 개봉 축하인 듯이 각 지방에서 무리지어 ‘벤허’를 관람하러 상경하는 인파는
70mm의 위력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새 봄 창경원 벚꽃 나들이를 겸한 당시 레저문화의
풍경이었다. 고작해야 극장 아니면 고궁, 유원지(뚝섬)등으로 가족나들이 하던 때였다.
국가적으로는 서독 광부와 간호사 파견, 월남 파병 등 외국 차관이 들어오고 한국 경제의 초석이 놓이는 격동기였다. 그때 한국 영화 또한 서서히 발전을 향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총천연색 시네마코프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 몇 년 전 '격퇴'라는 영화가
처음으로 천연색영화를 시도했었지만 본격적으로는 이용민 촬영감독이 일본 기술진과의
협조 하에 만들어 낸 '정복자'였고 그 후 '가야금'이 또 이어지는 칼라작품이었다.
이용민 촬영감독은 '지옥문'을 감독했었고 권영순 감독과 콤비가 되어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정복자' 그리고 세 번째로 '가야금'을 촬영감독 했던 것이다.
이용민 감독의 고집스런 성격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새벽에 촬영을 위해 모두 집합하면 먼저 이감독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상을 살핀다.
아주 멀리 구름 한 점 조그맣게 떠있어도
‘오늘 날씨가 흐리겠는데... 좀 더 있다 촬영을 나갈 것인지 결정짓자’ 고 했다.
당시 나는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흐린 날씨에 카메라 노출을 보면 화면이
밝게 나오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Nega film의 현상도 일본까지 가져가 했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우리의 영상 문화가 우위에 있으니...그 시절에 고군분투한 이들의 수고가 초석이 되어
지금의 한류 열풍이 일어난 것이리라 여겨진다.
 
한 울안에 사는 한성여고생과 둘이서 자주 만나 영화를 보면서 느낌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조용히 흐르는 서로의 눈빛을 본 고모님이 ‘달성 서씨네는 양반이지'
의미 있는 한마디를 툭 던지시는 거였다. ‘형제가 많아 다복해 보이지...?’ 라고도 하셨다.
나로서도 더 발전되는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닌데....
최금동씨가 집필 중이던 ‘가야금’ 시나리오 초고가 나왔고 한성여고 졸업식이 바로
내일이라는 급한 소식을 지인을 통해 듣고는 여러 가지 궁리를 많이 해보았다.
마침 경북 안동 출신이며 서라벌 예술대 연극영화과에 다니는 친구가 자주 놀러 왔던
무렵이라 머리를 맞대고 함께 연구했다. 깜짝 놀라게 해줄 선물...! 무엇일까?
긴 시간 궁리 끝에 찾아냈다. 둘이서 한성 여고 졸업식장을 은밀히 찾아갔다.
큰 라면 박스를 잘 포장해서 전해주었다. 주변의 친구, 다른 여고생들이 의아해하며
뜯어보라고 아우성이었다. 과감한 감정 표현의 미약함이 절대적 단점인 나로서는
그 자리를 지탱 못하고 난감하여 먼저 와버렸다. 뜯어보고 두 가지로 실망했을 것이다.
‘에게 겨우 이거?’ 그리고 ‘뱃심 없는 사람이군’ 이라고 했을지도...
‘겨우’ 라는 물건은 만년필이었다.
 
영화 ‘가야금’의 캐스팅이 확정되었다. 우륵에는 김진규, 그 상대역에는 김지미였고
그의 몸종으로는 강미애였다. 이예춘, 허장강 , 김희갑 등 역시 이 영화도 한국
영화배우 협회 회원 배우가 모두 총출동된 대작이었다.
무더운 여름, 북악산 로케이션 촬영 날이었다.
나는 의상, 소품확인, 준비하느라 분주한데 김진규씨 차가 도착하고 두 명의 교복 입은 여학생이 내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중 한 여학생은 그리 크지 않은 키에
유난히 눈이 크고 눈동자가 까만 미인이었다. 점심시간에 모두 쭈욱 둘러앉아 가져온
점심을 먹었다. 스틸 맨이 스냅 촬영한 사진 속에 김진규씨와 이예춘 두 여학생
그리고 나의 모습이 찍혔다. 그 후 오랜 시간 후에 다시 만나게 되는 그녀는...?
'가야금'은 가야금을 만든 우륵의 이야기라서 악기에 대한 전문 고증이 필요했다.
가야금을 타는 자세라든지 손가락의 리듬 등을 고증 코치해 주는 음악가가 항상 현장
카메라 옆에 있어야 했다. 그때 그 음악가를 그냥 가야금 잘 타는 선생이라고만 여겼는데
알고 보니 그 유명한 가야금 대가인 황병기 선생님이었다. 그분이 직접 그 영화
배경 음악도 담당했었다. 가야금 병창의 선율 속에 촬영이 완료되었다.
영화 촬영이 끝나는 것을 쫑이라고 했다.
작품은 쫑을 했고 개봉(국도극장)도 되었는데- 흥행이 부진했다.
흥행도 베스트 수위에 올랐던 권감독님의 호응도 점수가 급락했다.
제작자 조연순 원장의 사업이 흔들거렸다. 소유했던 빌딩이 넘어가고 조원장은 어디론가
옮겨 떠났다. 충무로의 수군거림은 '가야금이 빌딩을 말아 먹었다' 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영화에 투자하는 것은 위험한 모험이라고 모두 멀리하는 것이 되었다.
잘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수고한 모든 사람들이 아쉽게 여겼고 더욱 내 마음이
무너진 것은 난 잃어버릴 것이 많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흥행 작품 한 편에
3년 간다는 것이 충무로의 방정식이었다. 가야금의 흥행 실패로 공백 기간이 오래 갈 줄 알았지만
 권감독은 곧 다시 '3統 8班 女 班長' 이란 작품을 시작했다.
도금봉(都琴峰), 이대엽(李大燁)이 출연한 아주 작은 작품이었다.
이 작품 하면서 알게 된 감독이 있었다.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배신(背信)'이란 작품을
한 감독이었다. 그 당시 두 콤비를 엮어 많은 히트 작품을 내고 있는 정진우 감독이었다.
 정진모 제작자의 사무실에서 위의 두 작품을 제작한 것이다.
내 눈이 크게 떠지는 것 같았다. '카리스마가 강하게 풍겨 나오는 감독이구나!'
나는 부러운 마음으로 그 연출력에 빠져들었다. 그 이후 그와는 많은 인연의 만남으로
작품을 자주 같이 했다. 정감독은 작품을 초스피드로 완성시켰다.
그런 와중에 조감독 시스템이 분산되었다.
First 윤성한씨, Second 조웅대씨와 나는 신필림의 신상옥 감독 연출 시스템으로 옮겼다.
권영순 감독과는 헤어지게 된 것이다.                                    

  정리: 석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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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감독님 재미있어요~~
(2015-04-28 19:42:00)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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