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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세한 감독의 나의 人生 영화 人生 4
양지혜  |  ych20021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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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4.16  06: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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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가 없었던 시절! 라디오 연속 방송 드라마가 유일한 오락이었던 시절,
라디오 연속 드라마 '장희빈'은 굉장한 인기였다. 퇴근길에 지나가던 행인들이 그 시간이 되면 라디오 방 앞에 멈추어 서서 연속방송을 청취하곤 했다.
그런 인기를 등에 업고 만들어진 영화 ‘장희빈’!!
정창화 감독 작품이었는데 그 작품이 조감독이 두 명이었다고 한다.
조감독 구성은 제1조감독, 제2조감독, 제3조감독, 스크립터로 구성되었는데 제1조감독을 호칭하기를 First 라 했고 조감독을 임권택 감독과 정진우 감독이 보았단다.
 내가 임감독님의 First가 되기 전까지의 작품마다 임감독님과 함께 작품 동행 스테프이셨던 분장사 홍동은씨를 통해 임감독님의 에피소드들을 많이 들었다.
 
'장희빈' 촬영장에서의 에피소드인데 추석프로로 이미 결정되어 빠듯한 스케줄이 짜여져 촬영이 진행되었다. 최고급 주연 스타들의 시간에 맞추어 촬영이 진행되는 당시의 어려운 여건 속에 매일 주야로 촬영해야 겨우 추석 프로로 올릴 수 있는 절박한 때라 모든 것이 전쟁이다 시피한 날들이었단다. 낮 장면 신(Scen)인데 해는 넘어가려고 서산 턱에 걸려있어 카메라는 급히 돌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컷!' 소리가 났다고 한다.

NG가 난 것이다. 감독의 콘티에 의하면 길게 한 컷으로 가게끔 되어있었는데 정창화 감독은 넘어가는 해를 힐끗 힐끗하면서 '자~ 컷을 잘라서 간다, 카메라 UP 처리해!' 하며 카메라 포지션을 갖추려하자 조감독인 임감독이 '감독님! 한 컷으로 가야하는 콘티인데 왜~ 쪼개서 두 컷으로 갑니까?' 하며 정감독에게 따졌다는 것이다.

long shot의 원칙을 무시하는 연출에 감히 임감독이 항의한 것이다. '장희빈' 작품 전에도 사건이 또 있었다 한다.

'비련의 섬'이란 작품에서였는데 주연인 '김삼화'(당시 최고 인기 여배우)가 연출자의 리허설 때 약속된 대로 연기하지 않는다고 '김삼화'의 뺨을 올려 부친 것이다.
그로 인해 촬영 거부로 중단된 '비련의 섬'은 그 후 화해와 사과를 거치고는 재촬영 개시했다는... 충무로 역사에 길이 남는 이야기이다.
 
나는 마네킹 간판의 그림을 구도 잡다가 ' 어?' 김진규 김지미의 스틸 사진이 어딘지 마음에 안 들어 화룡 영화사를 향해 스틸 북을 들고 찾아갔다.
영화사에 들어서자마자 이화룡 사장의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원탁에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 제작 스태프들 속에서 돋보였다. 보스의 자태 그대로였다.
곱슬곱슬한 짧은 머리에 그리 크지 않은 몸집이지만 단단하고 강인해 보였다.
난 조심스럽게 '저~~' 하자 이화룡 사장이 '어드메서 왔소?'
'예 ~ 저 수도극장 선전부~' 하니 '야~! 제작부, 무슨 일인지 만나보라' 했다.
해서 선제를 마음에 드는 다른 컷으로 골라 그림을 다시 그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때 명보극장에는 신필림 제작 '신상옥' 감독의 '상록수'가  추석 프로로 붙었었는데  애초엔 국제극장에서만 '장희빈'을 개봉하기로 되었었는데 신감독의 상록수와 경쟁을 하기 위해 그 옆에 있는 수도극장(스카라)에서도 '장희빈'을 방영하게 됐다고 한다.
후일에 그 사실이 알려진 충무로의 '영화 죽이기 작전'의 한 방법이었다.
흥행 성공은 역시 '장희빈'이었다. '상록수'는 극장 문전이 허전했고 '장희빈'은 장사진으로 줄을 서게 되고 장기흥행의 성공이었다.
전회 매진, 매진 사례라는 이름으로 영화사, 극장에 '만원사례'라고 쓰여진 봉투에 돈을 넣어주었던 시절이다.
 
그 후 나의 첫 감독 작품 '26×365=0' 역시 전회 매진이 16일간이나 이어졌었다.
국도극장 단일 극장 개봉시절이었다.
그래서 나 역시 만원사례 봉투를 받아 보았다. 그 후 충무로 영화 역사 중반 쯤 후부터
이런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버렸다.
밀려들어오는 장희빈 관객을 뒤로 하고 나는 붓을 확! 꺾고 드디어 충무로 영화가에 입성했다.

 1962년 11월 21일 '권영순' 감독의 '정복자'(征服子)의 연출부로 발탁되었다.
꿈에 그리던 무대가 현실의 무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고모님의 친구 분을 통해 당시 국도극장 흥행담당 사장이었던 성동호 사장의 소개로 권영순 감독의 ‘정복자 ’에 입문(入門)하게 되었다. 먼저 오디션을 보았는데 수도극장에 있었다 하니 ‘정복자’ 시나리오를 건네주며 읽어보고 출연자의 의상 캐리커쳐 데생 그림을 그려오라고 했다. 서류 오디션의 주문을 받은 셈이었다.

신바람이 나서 자신 있게 그려 주었다. 그 영화는 만주벌의 독립군 투쟁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서 사카린 부대원, 백호 부대원, 일본군들의 의상을 제작해야 했던 것이다. 인연이 된 운명의 만남, 중고 시절 보았던 옥단춘 영화로 감독이 된 권영순 감독의 영화 '정복자‘로 난 영화감독의 꿈을 이루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감독 연출부가 10명이 뽑혔다. 마지막 구성 완료되어 함께 뛰게 된 조감독 그룹 중에 (당시는 연출부라고 했다) First 조감독은 윤성환, Second는 조웅대라는 선배이었고 모두 연, 고대 졸업자들이었다. 또 다른 작품에서 이미 이력을 쌓은 연출부가 옮겨 온 터라 불꽃 튀는 경쟁, 소위 생존경쟁 각축전이 벌어졌다.
열심히 노력하고 뛰는 사람이 결국 다음 작품까지 하게 되고 First 조감독으로 승진 할 수 있는 것이다.
감독의 눈 밖에 나면 이 작품 하나로 아웃 된다는 게 현실이었다.
 
권감독의 전작이 한양영화사가 제작한 ‘진시황제와 만리장성’이 공전의 히트를 해서 감독의 줏가가 오르고 작품의뢰가 쇄도했는데 당시 동아흥행사에서 권감독을 1순위로 잡아서 연출 계약을 했다고 들었다.

'진시황제와 만리장성'의 연기자, 시스템을 그대로 옮겼고 신영균, 엄앵란, 문정숙, 최남현, 황해 ,독고성, 이민자 등을  추가 캐스팅한 초호화판 블럭 버스터 대작이었다.
한국 영화배우 총출동이나 다름없었다. 준비기간엔 사무실에서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초년병인 연출부 10명은 각기 다른 개성으로 여러 모습을 보였다. 그 당시는 거의 군대식
명령복종이 요구됐다. 윗사람이 외출하며 ' 너 전화 좀 받고 있어' 하면 꼼짝 않고 그대로 이행했다.
 나에겐 좋은 찬스였다. 몸이 느린 다른  학부 졸업자에 비해 난 건대 국문과 재학 중이긴 했지만 수도극장의 사회 경험과 수많은 영화를 보았던 것이 큰 재산이고 힘이 되었다.
 의상, 소품의 리스트 작성, 쓰고 그리는 모든 궤도 작성 등등 내겐 계속 골든타임만이 다가왔다.

 First 감독 윤성한씨의 눈에 들었고 Second인 조웅대씨는 날이 갈수록 내게 더욱 가까이 다가와 나에게만 일을 시켰다. 조웅대씨는 진주농고 출신이며 교사를 좀 하다가 또 연극 희곡을 쓰다가 영화계에 뛰어든 베테랑이었다.
나도 나름 필체가 웬만하다 싶지만 그 분과는 비교할 수 없게 필체도 좋았다.
그 당시로선 나이도 많은 분이셨다. 이봉조씨와 신상옥 감독 후계자인 최인현 감독과 친구이자 일년 선후배 간이었다.

종로를 지나는 전철이 동대문을 거쳐 왕십리까지 운행됐던 시절.
 땡! 땡! 땡! 서울 시내 도로 한가운데를 멎고 떠나고!! 혜화역에서 내려 성북동 산 골목 동네에서 사는 조웅대 감독 집을 자주 갔었다.
나를 유독 사랑해주며 조연출 수업을 특별 지도해 준 분이었다. 그러나 모두 생활은 여유가 없었다.

그 당시의 조감독, 연출부는 월급도 따로 없었다.
그저 감독의 개런티에서 연출부 앞으로 얼마를 떼어주어서 분배해 갖도록 되어있었으니....
모두 생활고를 겪었다. 초년 연출부원은 견습생 취급하여 무보수가 태반이었다.
나 역시 세 작품을 마칠 때까진 교통비조차 집에서 갖다가 충당하곤 했다.
그것이 그 시절 충무로의 생태였다. 그 배고픈 시간을 어찌 다들 견뎠는지...
견디지 못하면 낙오 되는 것이다.
다행히 나는 집안의 여유로움에 그런 것을 크게 구애받지 않았기에 따지고 덤비고 하질 않았다. 고모님은 세탁소사업과 한복집 경영으로 무척 바쁘셨고 나의 진로가 열려지고 즐겁게 감독수업을 해 나가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도와주셨다.

돈화문 앞에 위치한 고모님의 세탁소 건너 길에서 멋진 모습의 진짜 바바리맨(!)이 택시를 잡아타고 사라지곤 했는데 바로 배우 황남 씨였다. 거의 매일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신필림 신상옥 감독 계열이었음을 후에 알게 되었다. 고모님은 김장을 여유있게 많이 담아서 조웅대 조감독 집에 갖다 주게끔 해 주셨다. 그 시절 한겨울엔 김치가 최고의 반찬이고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였다.

 김장을 못하면 창피스러워 얼굴을 감춘다는 아픔과 가난의 시절이었다.
 들통에 든 김치를 들고 성북동 산동네까지 걸어서 갖다 주며 감독 수업에 매진하던 그 시절의 열정이 지금 생각해도 생생하다.
그땐 그렇게 어려워도 정감을 서로 나누고 서로 도우며 살았다. 삭막하고 얼음 같은 요즘과는 정말 다른 세대였다. 겉보기엔 화려하고 멋져 보이는 영화계도 빈부의 격차가 아주 컸다. 그 중에도 연출부의 삶이란 배고픔과 고달픔 자체였다.
그런 나를 위해 고모님은 억척스레 고생하며 돈을 버시느라 애를 쓰셨다.
 
정복자의 촬영지는 주로 산악 지대 아니면 벌판인지라 포천 고석정 벌판 눈길 장면,
포천 광능내의 숲속이 독립군의 아지트였다. 신영균, 박노식, 최남현의 아지트인 광능내
냇가 촬영 중 문정숙이 낙마하여 허리를 다쳐 촬영이 중단되고 다음 해 여름까지 지연되었다. 겨울 장면을 연결로 담아야 하는데 계절이 맞지 않았다.

모래 산에 눈 효과를 내어 찍느라 피똥 싼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카메라 앵글 부위에 소금을 짝으로 쏟아 눈 효과를 내고 -그전에 미리 풀을 다
제거해야했다-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코에서 수돗물처럼 코피가 주루룩 흘렀다.
그러나 절대 멈출 수없는 도전이었다. 그 때는 겨울 날씨가 어찌 그리 춥던지...
영국제 중고  덜컹거리는 오스틴 차에 의상과  소품을 싣고 포개다시피 조여앉아  촬영현장을 다니던 게 가장 고생스러웠다.
통신, 교통수단이 완전 제로의 시대였기에 감독이 조수석에 앉아서 다녀야 했다. 한국 경제의 빈곤기에 시작된 영화계의 당연한 모습이었다.
 
 나의 인생 항로가 해방으로 시작되어 6,25
그리고 4,19의거 5,16 군사혁명 1962년 화폐 개혁, 박정희 대통령 정권 시작,
케네디 대통령 서거 등, 펼쳐지는 시대의 격동하는 물결 속에 내 인생도 실려서 나아가고 있었다.
드디어 '정복자' 개봉, 흥행 대성공에 이어 권감독에의 쉼 없는 연출의뢰!  나도 따라서 일을 쉬지 않고 할 수 있는 기쁨에 배고픔도 잊었었다 .  

내용 정리 : 석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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